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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주간지에서 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슬로우어답터만의 꼼꼼함(?)과 인사이트로 이 급변하는 세계를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duryd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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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어답터들에겐 관심이 없는 소식일테지만, IT 업계에서 주목하는 사건(?)이 오늘 시작됐습니다.

다음과 카카오의 합병을 정식으로 알리는 '다음카카오'가 10월 1일 공식 출범했습니다.


웨스틴조선호텔 그랜드볼룸은 상당히 넓은 장소인데, 기자들이 정말 많이 왔습니다.

그만큼 이날 발표되는 내용이 무엇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죠.

슬로우 어답터지만, 저도 참석했습니다.

다음카카오가 내놓을 '한방'이 궁금했거든요.


다음의 최세훈 대표와 카카오의 이석우 대표가 다음카카오의 공동대표 체제로 움직이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다음카카오의 향후 행보를 보여줄 새로운 서비스는 내놓지 않았습니다.

내놓지 않은 것인지, 내놓지 못한 것인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5월 합병 소식 이후 여러가지를 준비했지만, 프로젝트들이 덜 여문 것 같네요.


다음카카오가 지향하는 것은 '모바일 라이프 플랫폼 기업'이네요.

웹보다는 모바일에 치중한다는 거죠.

많은 이들이 다음이 카카오에게 먹혔다는 표현들을 많이 하는데,

다음카카오의 지향점을 보더라도 카카오의 힘이 더욱 커 보입니다. 

한남동에 있는 다음의 사무실도 카카오가 있는 판교로 옮긴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기자들 사이에서는 카카오에 힘이 쏠려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죠.

"서울과 판교의 거리가 멀어서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마지막 대안으로 나온 곳이 판교였다"고 다음카카오는 해명했습니다.


이날 가장 관심을 끈 내용 중 하나가 바로 텔레그램과 검찰의 SNS 모니터링이었습니다.

인터넷 검열은 사용자, 기업, 기자 등 모두에게 민감한 내용이었습니다.  




다음카카오 최세훈(), 이석우() 공동대표가 기자간담회에서 다음카카오의 CI 선보이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자료 사진입니다. 



어떤 내용들이 오고 갔는지는 보도자료의 Q&A와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Q 출범 후 김범수 의장(다음카카오 이사회의장)의 역할은?

A 다음카카오 통합법인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대주주로서 다음카카오 미래사업 비전 및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할 예정이다.


Q 다음카카오의 비전과 그 의미는?

A 비전은 '새로운 연결, 새로운 세상(Connect Everything, 상당히 도발적인 캐치프레이즈로 느껴지네요)이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을 이어주고 연결을 통해 끊임없이 정보를 주고 받으며 비즈니스를 창출하고, 더 나아가 마음으로 소통하는 세상의 중심에 다음 카카오가 있고자 한다.


Q 다음카카오가 앞으로 주력할 사업 분야와 전략은?

A 보다 편리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서비스를 중점적으로 제공할 것이다. 강력한 소셜그래프를 가진 카카오의 모바일 플랫폼과 다음의 검색 서비스의 강점을 기반으로 사용자를 위한 보다 혁신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새로운 모바일 생태계의 발전을 위해 파트너사들과의 협력도 지속,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Q 기존 사업 조직은 어떻게 통합, 운영할 계획인가?

A 조직 운영은 수평적 조직문화와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 기본적으로 '팀'단위로 유연하게 구성되며, 규모에 따라 하위조직으로 파트와 셀을 운영할 계획이다.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을 덧붙이자면.

다음카카오는 현재 10개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업비즈니스팀, 지원팀 등으로 나뉘어있다고 하네요. 수평조직을 구축하기 위해 내놓은 안이라고 합니다. 구성원들은 서로 영어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답니다. 최 대표는 윌리암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다음카카오에서 3명 정도가 윌리암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프로젝트에 따라 팀의 구성이 달라지는 형식이기 때문에 플렉서블한 팀제라는 표현을 하네요.


Q 서비스 측면에서 어떠한 변화가 있을 예정인가?

A 사용자의 편의를 고려해 당분간은 기존 서비스를 유지할 계획이다. 추후 유사한 성격의 서비스는 서비스의 장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통합/발전시키는 방향을 고려하고 있다. 


Q 사명을 다음카카오로 결정한 이유는?

A 다양한 아이디어를 검토했지만, 기존 사용자들에게 익숙한 양 사의 사명을 합친 다음카카오보다 더 뛰어난 이름이 없다고 판단했다. 


Q 합병 후 처음 출시되는 서비스는 무엇인가?

A 전략상 공개하지 못하는 점 양해해달라.



어쩌면 이날 가장 관심을 끈 것이 새로운 서비스가 뭐냐일 것입니다.

기자들의 질문도 여기에 집중이 되어 있었죠.

이석우 대표는 "어떤 서비스가 처음 출시될지 잘 모른다.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과연 어떤 서비스가 다음카카오라는 이름을 달고 나올지 궁금합니다.


Q 카카오 검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A 사용자가 걱정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최고의 보안 기술을 가지고 있고, 자체 서버에 보관되는 기간은 매우 짧다. 유출은 없을 것이다. 다만, 공정한 법집행을 할 때는 검찰에 협조를 하고 있다. 


Q 검찰이 사이버상의 모니터링을 강화한다고 했다. 해외 메신저 앱(텔레그램을 말하죠) 인지도가 높아졌는데, 타격은 없나.

A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어떤 서비스라도 해당 국가의 법 적용을 받게 된다. 거기에 따른 정당한 협조는 해야 할 것이다. 타격이 얼마나 클지는 예상 못하지만, 큰 파장은 없을 것이다.




러시아 프로그래머가 만들었다는 메신저 앱 텔레그램.


지난 주말 트위터에서 화제가 됐던 앱이 텔레그램입니다. 

검찰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카카오톡에서 했던 이야기가 모니터링 당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많은 이들이 '털릴' 염려가 없다는 텔레그램에 망명을 시작했죠. 

저도 한번 스마트폰에 깔아봤습니다.

지난 주말에 10여 명에 불과했던 사용자가 수요일이 되니까 내 연락처에 있던 이들 중에 100여 명이 가입을 했더군요.

전파 속도가 정말 빠릅니다.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검찰의 사이버 모니터링 강화가 엉뚱하게도 잘나가던 카카오톡에게 영향을 준 셈입니다.

'정부의 관심이 오히려 독이 된다'는 말이 이번에도 맞는 것 같네요. 

예전에도 지메일로 망명한다는 소동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메신저까지 타격을 입게 생겼습니다.

텔레그램에 대한 대책을 묻는 질문에 "대책은 없다. 열심히 해야 한다. 카카오톡에 대한 오해도 약간 있는 것 같다"고 이 대표는 밝혔습니다. 



Q 조직통합과 조직개편에 대한 내부 구성원의 불만이 많다고 하던데.

A 우리의 조직통합과 개편 방식은 남달랐다. 보통은 통합방식을 결정하고 직원에게 통보하지만, 우리는 수평적 문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통합을 어떻게 할 것인지 직원들의 의견을 들었다. 아지트나 게시판을 통해서 여러 방식을 통해 진행됐다. 그런 과정 속에서 어떤 안이 좋은지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다. 제안과정에서 불만이 나온 것 같다.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다음카카오에 대한 향후 행보를 약간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네이버의 독주가 한국 IT업계에 좋은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죠.

다음카카오의 합병이 네이버 천하에 균열을 낼지, 다음카카오 그릇에 균열이 생길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카카오가 네이버와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좋은 서비스들이 속속 나왔으면 합니다. 

Posted by duryd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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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의 세계는 너무나 빨리 변합니다.

1980년대 후반 PC 시대가 열리고, 인터넷이라는 무한대의 공간이 시작되면서

IT만큼 빠르고 혁명적인 움직임이 분야는 없습니다.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가 아니면 IoT(Internet of Things, 사물인터넷), OTT(Over the top), 플랫폼 등

언론에 소개되는 단어조차 이해하기 힘든 시대가 됐습니다.

포브스코리아에서 IT 분야도 맡고 있기에 새로운 트렌드, 새로운 단어가 나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을 하는데는 얼리 어답터가 되어야만 합니다.


한국은 IT 강국처럼 스마트폰 보급률이 세계 최고입니다.

IT의 새로운 기술이나 트렌드를 받아들이는데 한국 소비자만큼 빠른 나라는 없다는 이야기죠.

한국은 테스트 베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세계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시장에 속속 진출하는 이유(물론, 실패도 많이 하고 돌아가기도 합니다)입니다.


하지만, IT의 트렌드가 빠르게 생활에 스며들어도 IT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애플TV가 나온지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용해본 이들도 드물 것입니다.

구글 글라스가 혁명이라는 이야기를 듣지만, 아직도 구글 글라스는 한국에서 먼 이야기입니다.

삼성이 스마트싱스를 인수해 스마트홈 전략을 쓴다고 하지만, 여전히 스마트싱스는 생소한 일일 뿐입니다.


IT의 흐름에 조금 뒤쳐진다고 해서 우리 삶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IT 트렌드를 조금 늦게 받아들인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얼리 어답터가 할 일이 있고, 슬로 어답터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IT의 흐름에 뒤쳐진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블로그를 개설했습니다.


슬로 어답터답게 PC와 인터넷을 다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90년대 초반 학번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처음 접하게 된 것이 PC입니다.

하지만 PC도 전산실에서나 만질 수 있는 도구였죠.

자판 연습을 한다고 한매타자 게임을 하던 게 전부였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만진 IT 기기(?)는 워드프로세서입니다.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이 아니라 타자기 자판과 조그마한 화면, 그리고 인쇄가 되는 프린터가 한 몸뚱아리로 되어 있는 하드웨어입니다. 당시 과 신문을 만든 경험이 있는데, 사진과 비슷한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해서 만들었죠. 종이를 인쇄해서 격자판에 직접 오려 붙여서 판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일을 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원시적인 형태였죠.


PC는 그냥 리포트를 쓰고 인쇄를 하는 기계에 불과했죠.

PC의 시대를 거쳐서 인터넷이라는 혁명적인 도구가 나온 것도 1990년대입니다.


1997년 대학생 기자로 ‘인터넷의 아버지’라는 전길남 카이스트 박사를 만나서 인터뷰를 할 때 전 박사님의 얼굴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인터넷이라는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대학생과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얼마나 갑갑했겠어요. 인터뷰 도중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사무실에 있던 화이트보드에 인터넷 개념도를 직접 그려주시더군요. 저에게 인터넷은 넘사벽이었습니다. 그냥 사용만 할 줄 알았지, 인터넷이 왜 혁명적인 도구였는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했던 거죠. 


하지만 선수들은 PC와 인터넷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었죠.

그들이 바로 지금 IT 시대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누가 먼저 이해하느냐에 따라 리더가 결정되는 듯 합니다.

90년대도 아닌 1980년대 중후반 학번들이 한국의 IT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IT 시대 리더가 될 수 있는지를 취재해서 기사로 냈습니다.

그때 그 시절, 응답하다 1986입니다.  


201409호 (2014.08.23) [130]확대축소프린트블로그 저장목록보기
IT LEADERS - PC·인터넷·운이 만든 86학번 리더들
IT 생태계를 이끌어가는 86학번의 파워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부터 엑스엘게임즈 송재경 대표까지 많은 86학번들이 IT 업계의 리더로 활발하게 뛰고 있다. 86학번이 이 분야의 리더가 된 이유를 찾아봤다.

(왼쪽부터) 김정주 NXC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1980년대 중반부터 대학가에 PC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김정주 NXC 회장·바람의 나라 등의 게임을 개발한 엑스엘게임즈 송재경 대표·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서울대 컴퓨터공학과),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서울대 산업공학과),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연세대 컴퓨터과학과), 곰플레이어로 유명한 그래텍 창업자 배인식 전 대표(국민대 금속공학과)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86학번’이라는 것. 국내 IT(Information Technology) 업계를 선도하는 이들을 보면 ‘1986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지난 5월, 한국 IT 업계는 다음과 카카오의 합병 소식에 숨죽였다. 결과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큰 변화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NHN이라는 공룡과의 경쟁에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86학번이 다시 IT 흐름을 바꿔놓는 쇼킹 뉴스를 만든 것이다. 86학번은 어떻게 IT 리더가 됐을까.

“1980년대 후반은 PC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였고, PC는 우리들의 무기였다.” 얼마 전 그래텍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야인이 된 배인식 전 대표의 설명이다. 그 당시 각 대학에는 PC가 마련된 전산실이 신설되기 시작했다. 서울대에는 전산원이 생기고, 학부 별로 컴퓨터실이 설치됐다. 하지만 기업과 학교 등 대다수 기관은 여전히 윈도우즈가 아닌 유닉스 운영체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이창건 교수(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7학번)는 “PC에 별 관심이 없었던 때였다”며 “80년대 후반 PC 사양이 좋아지면서 유닉스와 경쟁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기업과 기관에서 PC를 ‘장난감’이라며 무시한 탓에 PC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는 거의 없었다. 결국 PC에 미친 괴짜들이 직접 나섰다. 대학가에 컴퓨터 동아리가 속속 생기고 유니코사(UNICOSA, 전국대학컴퓨터서클연합)에 컴퓨터 고수가 모여들었다. 변변한 책자 하나 없던 시절, 선배는 후배를 직접 가르쳤다. 학생들이 직접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도깨비 카드라는 하드웨어(용량이 큰 소프트웨어를 담을 수 있는 하드디스크)를 만들어 PC에 꽂아 쓰는 이도 나타났다. 용산전자상가는 학생들이 만든 프로그램과 하드웨어를 복제해 팔았다. 한양대 학생들은 바른글이라는 워드프로세서를, 서울대 컴퓨터동아리는 아래아한글1.0을 내놓았다. 이처럼 80년대 중후반 학번 학생들은 PC시대를 선도했다.

정부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1987년 당시 오명 체신부 차관은 유니코사에 가입한 대학 동아리에 PC통신을 할 수 있는 XT급 컴퓨터와 모뎀, 프린터를 설치해줬다. 이듬해 유니코사 회장을 맡았던 배 전 대표는 “그때 정부에서 유니코사에 지원해준 컴퓨터 비용이 각 학교마다 700만원 정도였다”고 했다. “정부는 88서울올림픽 전산망 운영에 유니코사 회원 300여 명을 투입시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차관에서 장관에 오른 오명 체신부 장관은 ‘적은 투자로 큰 성공을 거뒀다’고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86학번에게 PC는 경쟁력이었고 무기였다. 이해진 의장, 김범수 의장, 김정주 회장 등은 선배들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공부 대신 취업을 선택한 것. 85학번까지는 대부분 석사를 마치고 유학길에 올랐다. ‘석사장교’ 제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84년부터 1992년까지 운영됐던 단기 장교 복무제도다. 석사소지자 중 시험으로 선발해 6개월간 군사훈련을 마친 후 소위 임관과 동시에 전역한다. 

당시 일반병의 복무기간은 3년으로 석사장교 제도는 유학을 꿈꾸는 이들에게 최고의 혜택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1990년 4월 1일 ‘대학원 졸업생 등의 병역특례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폐지되면서 끝났다. 1989년 이전에 대학원에 입학해 재학 중인 학생까지는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1990년에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86학번은 석사장교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이창건 교수는 “86학번 선배들은 박사 과정 대신 창업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86학번은 석사를 마치고 유학길에 오르는 대신 병역특례자로 취직했다. 1990년대 초 이해진 의장과 김범수 의장은 삼성SDS, 김정주 회장은 대덕전자에 병역특례자로 입사했다. 배인식 전 대표는 군대를 다녀온 후 1993년 삼성전자 소프트웨어사업팀에 들어갔다. 삼성은 다른 대기업보다 일찍 컴퓨터 고수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1년부터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 소프트웨어멤버십 제도다. 내노라하는 컴퓨터 괴짜들이 이 제도를 통해 삼성에 입사했다.


벤처 인프라 갖춰진 상황에서 창업했던 세대

삼성에 입사한 86학번은 PC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인재들이었다. 직장 선배나 부서장들도 갓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컴퓨터 관련 프로젝트를 일임할 정도였다. 배 전 대표는 “소프트웨어 기획부터 개발, 홍보까지 혼자 다 알아서 했다”고 돌이켰다. “용산에 가서 직접 물건을 팔기도 했다. 김범수 의장이나 이해진 의장도 인터넷 시대를 대비한 일을 스스로 찾아서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중요하지 않은 부서에 있었지만, 내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창업의 밑거름이었다.” 이해진 의장은 삼성SDS 재직 당시 네이버의 기초가 되는 검색프로그램을 연구했다.

이들이 창업에 관심을 가질 때 한국사회에서는 벤처창업 붐이 일었다. 코스닥 시장이 열렸고, 창업투자사도 등장했다. 비운의 벤처1세대로 불리는 메디슨 이민화 전 회장(현 카이스트 교수)은 저서 『한국벤처산업발전사』에서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1996년부터 벤처기업협회를 중심으로 제기된 벤처기업 육성책을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벤처 인프라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특히 코스닥 시장 활성화와 1997년 제정된 벤처기업 특별법에 담긴 제도 등이 주요 인프라다. 여기에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창업전선에 뛰어든 군단이 (벤처)3세대를 형성했다.’ 1994년 김정주 회장이 넥슨, 1998년 김범수 의장이 한게임, 1999년에 이해진 의장과 배인식 전 대표가 각각 네이버와 그래텍을 설립했다. 이민화 전 회장은 이들을 “20세기 마지막 창업열차에 오른 신예그룹”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IT 분야에 큰 흔적을 남기고 있는 86학번의 또 다른 공통점은 누구보다 앞서 인터넷의 가능성을 점친 것.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권태경 교수(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9학번)는 “선배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1990년대 중반에 인터넷 시대가 열렸지만, 인터넷 생태계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예측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눈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벤처 붐이라는 시대적 상황까지 맞아떨어졌다. 86학번은 운도 좋았다.” 86학번이 IT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PC와 인터넷 그리고 운이라는 3박자가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끝)


Posted by duryd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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